밀레의 <키질하는 사람> 속에 프랑스의 삼색기가 숨어 있다니! 밀레가 의도한 것일까? 아니면 미술평론가가 발견한 것일까? 어찌 됐든 간에 농민을 사실적으로 그린 아름다운 작품이다.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는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농민의 노동과 삶을 화폭에 담은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미화나 이상화 없이, 인간이 자연과 맺는 실존적 관계를 진지하게 탐구했다. 특히 1847~1848년에 제작된 <키질하는 사람>은 밀레가 본격적으로 농민의 삶을 주제로 다룬 초기 대표작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단순한 풍경을 넘어서, 시대적 현실과 인간의 존엄성을 함께 포착했다. 고된 육체노동을 담담히 그려낸 장면은 당시 예술계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였다.
작품 속 주인공은 어두운 헛간 안에서 곡식을 키로 터는 남성이다.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져 있지만, 단단하게 잡은 손과 무릎 위의 키에서 그의 노동 강도가 느껴진다. 이때 주목할 점은 인물의 의복이다. 그는 빨간 조끼, 흰 셔츠, 그리고 푸른 바지를 입고 있다. 이는 우연이 아닌, 프랑스의 삼색기(Tricolore)—자유(파랑), 평등(흰색), 박애(빨강)—의 색을 연상시킨다. 밀레는 평범한 농민을 통해 프랑스 민중의 정신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농민의 육체는 곧 공화국의 토대이며, 그의 노동은 삼색기를 구성하는 이상과 깊이 맞닿아 있다.
<키질하는 사람>이 발표된 1848년은 프랑스 역사에서 전환점이 된 해였다. 2월 혁명으로 인해 루이 필리프 왕정이 무너지고,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 혁명은 도시 노동자뿐 아니라 농촌 민중의 고통과 불만이 누적된 결과였다. 밀레는 정치적인 언동은 삼갔지만, <키질하는 사람>에서 삼색기의 색을 입은 농부를 전면에 내세우며
, 혁명의 정신이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지를 암시했다. 이는 평등과 자유가 도시 지식인만의 것이 아니라, 땅을 일구는 자들의 것이기도 하다는 묵직한 메시지였다.
1848년 살롱전은 검열 없이 누구나 출품할 수 있었던 첫 공식 전시였다. 밀레는 이 자유로운 전시 환경 속에서 <키질하는 사람>을 출품했고, 그 작품은 당대 평론가들과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이전까지 역사화나 신화화가 미술의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농민이라는 ‘현실의 주인공’이 미술의 중심에 선 것이다. 밀레가 삼색기 색을 인물의 옷에 입힌 것은 우연이 아니라, 민중이 곧 국가의 상징임을 시각적으로 선언한 것이며, 혁명기의 새로운 미적 언어로 기능했다.
밀레의 <키질하는 사람>은 단순한 사실주의 회화가 아니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의 이상과 농민의 현실이 만나는 교차점에서, 예술이 사회적 진실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작품이다. 특히 빨강, 파랑, 흰색의 상징적 조합은 농민이 단지 노동의 주체가 아니라, 국가와 사회를 지탱하는 중심임을 말해준다. 밀레는 침묵 속에서 민중의 목소리를 그렸고, <키질하는 사람>은 그 시대의 정신을 삼색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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