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에서 불빛을 밝히는 두 소녀의 모습은 때 묻지 않은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존 싱어 사전트의 그림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를 처음 보았을 때, 그 따뜻한 빛과 정적 속의 생기를 오래도록 눈에 담고 싶었다.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1856~1925)는 미국 출신이지만 주로 유럽에서 활동한 화가로, 사실주의 기법에 인상주의적인 색채를 더한 회화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초상화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으며, 당시 상류층 인물들의 모습을 우아하고 세련되게 그려내어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사전트는 개인적으로 풍경화와 수채화에 더 큰 애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유로운 야외 작업을 통해 자연과 빛을 탐구하고자 했다. 그는 빛의 효과를 섬세하게 포착하는 데 뛰어난 감각을 지닌 화가였고, 이는 그의 대표작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Carnation, Lily, Lily, Rose)>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는 사전트가 1885년에서 1886년에 걸쳐 완성한 대형 유화 작품으로, 두 소녀가 저녁 무렵 정원에서 종이등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장면은 자연광과 인공 조명이 조화를 이루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전트는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두 여름 동안 해질 무렵의 빛이 가장 아름답게 비치는 시간에만 작업을 했다. 백합과 장미, 카네이션으로 가득한 정원 속에서 어린 소녀들이 빛을 밝히는 모습은 매우 서정적이고 동화 같은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그림의 제목 역시 꽃 이름을 나열한 것으로, 영국의 동요 가사에서 착안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사전트가 초상화가로서의 성공에서 벗어나 보다 순수한 예술가로 나아가고자 한 시도를 보여준다.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는 1887년 영국 왕립아카데미에 전시되며 큰 호평을 받았고, 이후 그를 예술적 깊이를 지닌 화가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섬세한 자연 묘사와 인물 표현, 그리고 빛을 다루는 정교한 감각은 사전트의 회화 세계를 대표하는 요소로 꼽힌다. 오늘날에도 이 작품은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사전트를 상징하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화려하거나 과장되지 않은 일상 속 한순간의 아름다움을 포착한 이 그림은 보는 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잊고 있던 순수함이 조용히 깨어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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