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재배의 기원
구석기시대의 사람들은 식물의 뿌리, 잎, 종자, 과실 등을 채취하거나 사냥을 하고 물고기를 잡아서 식량을 확보하였으며 한 곳의 식량이 떨어지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다.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때는 최후의 빙하기가 끝나고 지구의 기온이 현재와 비슷해진 약 1만년 전의 신석기시대 초기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유럽, 중동, 아시아의 일부에서 빙하가 급격히 녹아서 호수와 습지가 증가하였으며, 호수에는 물고기가 증가하였다. 인류는 유동성 수렵을 중지하고 호수 근처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착생활의 결과 생활쓰레기가 버려지는 곳에서는 먹다 버린 음식에서 먹을 수 있는 식물이 자라는 것을 자연발생적으로 발견하게 되었으며, 여기에서 작물이 발생하였다고 추정된다. 원시인들이 산과 들에서 채취한 자연식물의 과실을 먹고 주변에 버린 종자에서 똑같은 식물
이 자라나는 것을 보고 파종이라는 관념을 배웠다고 추정된다. 한편 원시시대에는 음식물을 묘소에 공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공물로 뿌려진 야생식물의 열매에서 싹이 터서 자라는 것을 보고 재배라는 관념을 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과실을 구하러 산야를 헤매다가 집 근처로 옮겨 심으면 편하리라는 생각에서 이식이라는 관념을 배웠을 것이다. 남자는 수렵이나 어로 또는 유목을 하고 농경은 주로 여자에 의해 이루어졌으리라 추측한다. 농경의 발상지는 큰 강 유역이나 산간부 또는 해안지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DE CANDOLLE(1884)은 큰 강 유역은 주기적으로 강이 범람해서 비옥해져 농사짓기에 유리해 원시농경의 발상지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N.T.VAVILOV(1926)는 큰 강 유역은 비옥하기는 하나 범람에 의해 원시농업이 근본적으로 파멸될 우려가 있으므로 최초의 농경이 정착하기가 힘들어 기후가 온화한 산간부 중 관개수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곳은 농경이 용이하고 안전하므로 산간부를 최초의 발상지로 추정했다. P.DETTWEILER(1914)는 기후가 온화하고 토지가 비옥하며 토양수분도 넉넉한 해안지대를 농경이 발상지로 보았다. 해안지대는 농경뿐만 아니라 어렵을 하기도 편리하다. 또한 원시인류는 빙하기 직후 아프리카를 떠나 지구를 이동할 때 적도 부근의 해안가를 중심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농경의 발상지를 해안가로 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
2. 세계 재배의 발달
식물은 필요한 양분을 물에서 얻는다는 견해가 16세기까지 지배적이었으나 17세기에 이르러 식물체의 양분이 토양에서 유래함을 알았고 18세기에는 N, K, Mg이 필수원소임을 알았다. 19세기부터 식물영양에 관한 과학이 급속히 발전하였다. 식물에도 암수의 구별이 있다는 것이 1694년 R.J.CAMERARIUS에 의해 처음 밝혀진 후 1761년 R.J.KOELREUTER는 '식물의 성에 관한 실험과 관찰'을 출간하고 교잡에 의하여 개체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작물의 개량은 1859년 종의 기원을 발표한 다윈의 진화론이 나온 후 발전하였다. 진화론에서는 획득형질이 유전한다고 보았으나 WEISMANN은 1886년 획득형질이 유전하지 않느다고 주장하여 용불용설을 부정하였다. 1865년 멘델은 완두의 교잡실험 결과로 멘델의 유전법칙을 발표하여 유전학의 기초를 이루었다. 1901년 달맞이꽃 연구에서 돌연변이를 발견하고 1908년 초파리 실험으로 반성유전을 발견하여 유전학이 크게 발달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 유전공학이 발달하면서 내병충 형질전환 품종의 개발이 급진전되었다. 농경이 시작된 이후 재배가 지속되면서 병해충이 늘어갔다. 농부들은 작물을 윤작하거나 수확 후 식물체 잔해를 제거하거나 태우면 병해충이 억제된다는 것을 알았다. 잡초는 손으로 뽑거나 김을 매거나 경운하여 제거하였고 해충은 손으로 제거하였다. 이와 같은 방제법은 18세기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이후 소금, 재, 비누 등으로 잡초 제거를 시도하고 제충국이나 비소로 해충을 억제하고자 했다. 19세기에 이르러 무기물 등 천연산물을 농약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인류가 정착농경을 시작한 이래 작물의 재배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 가운데 하나는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20세기 중간까지 다른 재배기술은 크게 발전했어도 제초만은 여전히 인력에 의존했다. 그런데 1941년 미국에서 최초의 화학적 제초제로 2,4-D를 합성하면서 화학약제에 의한 제초기술이 급격히 발전하였다. 다윈이 1880년 식물의 굴광성을 관찰한 후 네덜란드인 WENT는 1926년 귀리의 어린 줄기 선단부에서 식물생육조절물질이 존재함을 확인하였다. KOEGL(1934~1935) 등은 이 조절물질의 본체가 옥신임을 규명하였고 옥신은 최초의 식물생장조절제 즉 식물호르몬이었다. 1926년 일본의 삭물병리학자인 쿠로다와는 벼의 키다리병을 일으키는 원인물질이 병원균의 대사산물이며 세포의 신장을 촉진하는 식물생장조절제임을 밝히고 이 물질을 지베렐린이라고 명명했다.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향을 피우면 과실의 후숙이 촉진됨을 알았고 독일에서는 가스등을 켜면 식물의 노쇠와 낙엽이 촉진되는 것을 알았다. 1930년 이 가스가 에틸렌임이 확인되었고 그 후 에틸렌을 발산하는 합성생장조절물질인 에스렐이 개발되면서 폭넓게 이용되고 있다. 한편 1949년 강낭콩 줄기의 신장을 억제하는 물질로 2,4-DNC가 발견된 이래 여러종류의 생장억제물질이 등장하여 작물재배에 이용되고 있다.
3. 우리나라 재배의 기원과 발달
한반도에서는 많은 신석기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며, 드물지만 구석기시대의 것도 발굴된다.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에서 1978년 4월에 발견된 주먹도끼와 가로날도끼 등 아슐리안계 구석기시대의 유물은 한반도의 문화가 멀게는 20만년 전, 가깝게는 45,000년 전에 존재하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나라 재배의 기원은 이들 구석기 및 신석기 시대의 발달과 맥을 같이 했을 것이다. 유물로 본 우리나라의 작물재배의 역사는 최대 15,000년 정도 된 것으로 보인다.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에서 출토된 탄화된 피, 평양의 남경 유적지에서 출토된 조는 기원전 6000년경의 유물이다. 기록에 나타난 한반도의 재배역사는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를 통해 삼한시대에는 보리, 기장, 피, 콩, 참깨 등의 오곡이 재배되고,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쳐서 명주를 짜는 법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메뚜기가 벼의 큰 해충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벼가 재배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통해서도 벼가 재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에는 농경이 현저하게 발달하였다. 백제에는 오곡, 각종 과일, 채소, 벼, 삼, 뽕나무, 약용식물이 재배되었고 양조법, 양축법, 직조법도 발달하였다. 신라에서는 오곡, 벼 이외에 뽕나무 재배와 견직물이 발달하고 목축에 힘썼으며 농경에 축력을 이용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각종 작물들뿐만 아니라 각종 과실, 채소, 관상식물도 발달하였다.
출처: 삼고 재배학원론(채제천, 박순직, 강병화, 김석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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